검은 언덕 위

현기증으로 칠한 대기와 두통으로 조각된 대지 위로
머리 없는 태양이 끈적한 빛을 흘리며 쓰러진다
운명의 진회색과 절망의 주홍색이 넘치는 무대
색색의 변명은 값을 잃고 존재는 다시 번역된다
시린 수치감에 그저 무거운 안개로 낭독했던 세계
허나 저 멀리 검은 언덕 위
투명한 풀과 꽃의 피가 낭자한 곳
영원히 번역할 수 없는 문장 하나 우뚝 서 있다
멀리서 훔쳐보며 불안에 들떠 보낸 나날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두통을 잊었으나 두통은 나를 잊지 않았으니
문득 시곗바늘이 낯선 곳을 향한다
언덕을 향하며 밟은 조각난 안개에서 달콤한 신음이 새어 나온다